남은 부분은 생략이다
저 물가, 상사화 숨 막히게 져내려도
한 번 건넌 물엔 다시 발을 담그지 않으리라
널 만나면 너를 잃고
그를 찾으면 이미 그는 없으니
십일월에 떠난 자 십일월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번뇌는 때로 황홀하여서
아주 가끔 꿈속에서 너를 만난다
상처로 온통 제 몸 가리고 서 있어도
속이 아픈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
오래 그리웠다
산을 오르면서 누구는 영원을 보고 누구는 순간을 보지만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사람이 평생을 쏟아부어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온몸으로 말하는 나무와 풀꽃같이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은
무욕의 정신이여
그때 너는 말하리라
고통이라 이름한 지상의 모든 일들은
해골 속 먼지보다 가볍고
속세의 안식보다 더한 통속 없으니
뼈아픈 사랑 없이는
어떤 하늘도 건널 수 없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마침내 밤이 오고
마지막 새소리 떨어져내릴 때
-권경인, 「슬픈 힘」(『변명은 슬프다』, 창작과비평사, 199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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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했다지만, 삶의 딜레마는 늘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는 데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로, 글로, 언어로 결코 다 표현하고 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나누기를, 그래서 우리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고 증명받기를 원한다. 어쩌면 예술의, 특히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인 시나 음악의 힘은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언어로 채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을, 역설적이게도 언어를 통해서, 그러니까 끊임없이 미끄러지듯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이란 삶을 충실하게 재현(mimesis)하고 있다. 예술도, 삶도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시포스의 돌처럼, 예정된 실패를 알고서도 그것을 기꺼이 영원히 반복하는 행위인 것이다.
권경인의 「슬픈 힘」이 강한 울림을 주는 지점 역시 거기에 있다. 이 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일방향성에 대해서, 그것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통과 번뇌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고통과 번뇌를 딛고 다시 나아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가를 이제 겨우 터득하자마자 죽어야 한다니”(『인간학』 VI 511) 칸트가 말했듯이, 우리가 경험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더 나은 삶을 산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데, 그것은 일방통행이어서 결코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떠난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며, 과거를 바로잡지 못하며, 다만 번뇌로, 그리움으로 그 시간을 추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상처투성이로 그리워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그저 절망하고 주저앉고 말 것인가? 바로 이 때, 위의 시는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 사람이 평생을 쏟아부어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 온몸으로 말하는 나무와 풀꽃같이 /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은 / 무욕의 정신이여” 그렇다. 우리는 그토록 괴롭고 시린 번뇌가 다 지난 뒤에야, 뼈아픈 사랑 뒤에야, 그 모든 고통을 먼지보다 가볍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게 될 때, 그때 우리는 다시 좀 더 성숙하게 사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느덧 봄이다. 마음과 상관없이, 어김없이 계절이 그렇게 또 바뀔 때, 나는 아직 상처투성이인 속이 아픈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간절히 바란다. 늘 그렇듯이, 그들이 상처를 주고받았던 시간 속에서 다시 위로받고 사랑하게 되기를.
저 물가, 상사화 숨 막히게 져내려도
한 번 건넌 물엔 다시 발을 담그지 않으리라
널 만나면 너를 잃고
그를 찾으면 이미 그는 없으니
십일월에 떠난 자 십일월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번뇌는 때로 황홀하여서
아주 가끔 꿈속에서 너를 만난다
상처로 온통 제 몸 가리고 서 있어도
속이 아픈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
오래 그리웠다
산을 오르면서 누구는 영원을 보고 누구는 순간을 보지만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사람이 평생을 쏟아부어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온몸으로 말하는 나무와 풀꽃같이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은
무욕의 정신이여
그때 너는 말하리라
고통이라 이름한 지상의 모든 일들은
해골 속 먼지보다 가볍고
속세의 안식보다 더한 통속 없으니
뼈아픈 사랑 없이는
어떤 하늘도 건널 수 없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아도 마침내 밤이 오고
마지막 새소리 떨어져내릴 때
-권경인, 「슬픈 힘」(『변명은 슬프다』, 창작과비평사, 199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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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했다지만, 삶의 딜레마는 늘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는 데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로, 글로, 언어로 결코 다 표현하고 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나누기를, 그래서 우리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고 증명받기를 원한다. 어쩌면 예술의, 특히 언어를 사용하는 예술인 시나 음악의 힘은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언어로 채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을, 역설적이게도 언어를 통해서, 그러니까 끊임없이 미끄러지듯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이란 삶을 충실하게 재현(mimesis)하고 있다. 예술도, 삶도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시포스의 돌처럼, 예정된 실패를 알고서도 그것을 기꺼이 영원히 반복하는 행위인 것이다.
권경인의 「슬픈 힘」이 강한 울림을 주는 지점 역시 거기에 있다. 이 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일방향성에 대해서, 그것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통과 번뇌에 대해서, 그리고 그러한 고통과 번뇌를 딛고 다시 나아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가를 이제 겨우 터득하자마자 죽어야 한다니”(『인간학』 VI 511) 칸트가 말했듯이, 우리가 경험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더 나은 삶을 산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데, 그것은 일방통행이어서 결코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떠난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며, 과거를 바로잡지 못하며, 다만 번뇌로, 그리움으로 그 시간을 추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상처투성이로 그리워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그저 절망하고 주저앉고 말 것인가? 바로 이 때, 위의 시는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 사람이 평생을 쏟아부어도 이루지 못한 평화를 / 온몸으로 말하는 나무와 풀꽃같이 /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은 / 무욕의 정신이여” 그렇다. 우리는 그토록 괴롭고 시린 번뇌가 다 지난 뒤에야, 뼈아픈 사랑 뒤에야, 그 모든 고통을 먼지보다 가볍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리운 것이 많아도 병들지 않’게 될 때, 그때 우리는 다시 좀 더 성숙하게 사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느덧 봄이다. 마음과 상관없이, 어김없이 계절이 그렇게 또 바뀔 때, 나는 아직 상처투성이인 속이 아픈 사람들의 따뜻한 웃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간절히 바란다. 늘 그렇듯이, 그들이 상처를 주고받았던 시간 속에서 다시 위로받고 사랑하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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